당뇨병을 이긴 한의사,
신동진 원장
당뇨병임을 알게되다
2009년 9월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날엔가부터 몸이 좀 무겁고 피곤한 느낌이 있었지만 살이 좀 쪄서 그런가 싶어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운동을 좀 해야겠다’ 정도였지요.
두달쯤 지나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아파트 노인정 위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무료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태어난 둘째아이를 보느라 정신없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새벽시간을 이용해 운동하기를 4주 정도 되었을까요. 도대체 내 몸은 언제쯤 가벼워지고 상쾌해질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피로는 갈수록 심해지고 손가락 관절이 굳는 일이 아침마다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한 다음날 아침이면, 손목의 힘줄이 딱딱하게 굳어서 손가락을 일일이 하나씩 펴주고 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증상들조차 운동을 열심히 한 결과라고만 생각하며 몇 달을 또 보냈습니다. 보약도 좀 먹어가면서요.
그러던 어느날 아무 이유없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나의 하루를 복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몸에 이상이 생겼구나 ’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근무 중에는 한 번 갈까 말까 했던 화장실을 4-5번씩 다녀오고, 찬물을 3-4잔씩 마시는 등 전형적인 당뇨병 증세였건만, 한의사인 저 자신은 의심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덜컥 겁이 나는 마음에 대기실에 있던 체중계에 올랐습니다. 평소보다 5kg이나 빠졌더군요. 벨트 구멍이 하나 줄어든 건 운동의 효과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갑자기 이렇게 많이 빠진 줄은 몰랐습니다.
당장 아랫층에 있는 내과선생님께 찾아갔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혈당을 재어 주셨습니다.
결과는 379, 충격적인 수치였습니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췌장암인지 확인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도 암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화혈색소 수치인 HbA1c 결과가 10.9로 내과와 대학병원 모두에서 똑같이 나왔고, 분명 당뇨병이었습니다. 대학병원에선 3-4일 입원해서 인슐린 주사로 혈당을 떨어뜨린 뒤에 퇴원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한의사의 자존심 때문인지, 며칠 생각해보겠다고 한뒤 식이요법과 운동요법 교육만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한의사인 저도 이해하기 힘든 식이요법 교육을 받으면서 ‘아, 어르신들 들으시라고 하는 교육은 아니구나’ 란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긴 하루 끝, 집에 돌아오는 제 손에는 3개월 후로 잡힌 진료예약증과 한아름의 당뇨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걱정과 불안의 나날을 보내고
집사람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갓 돌 지난 아이가 있는 아빠가 당뇨병 진단을 받았으니, 거기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까지 해야한다고하니 그 불안한 마음이 어디 눈물샘을 가만두었겠습니까. 아내를 잠시 진정시키고 제천에 계신 스승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 말을 경청해주신 뒤 당뇨병에는 이런 저런 약재들을 써야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는 걱정 탓에 일도 손에 못 잡으셨지만, 정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은 저였습니다. 제 앞에는 양약 한 봉지와 물 한 컵이 놓여있습니다. 그 약 앞에는 그깟 양약 하나 맘대로 먹지 못하는 불쌍한 한의사가 앉아 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제 병은 제가 고치겠다 큰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단지 한의사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저에게 애원을 합니다.
“그냥 우선 양약을 먹고 조금이라도 혈당을 떨어뜨려… ”
귀에 안 들렸다 뿐이지, 아내의 이 말 뒤엔 ‘떨어뜨려 주·세·요’ 라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바삭바삭 소리 나는 약봉지를 찢어 제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저는 도전보다 안정을 택했습니다. 언제나 도전! 이라고 외치던 한의사 신동진은 이렇게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래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자…
마법과도 같은 양약의 힘에 취하기 전에 열일 제쳐두고 도서관과 서점을 다녔습니다. 있는 책 없는 책 전부 구해다 보았고, 있는 약 없는 약 닥치는대로 구해 먹었습니다. 환자 많기로 유명하신 선배님께서도 친히 비방을 적어주시며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천 스승님의 처방에 약재를 선별하여 추가하는 작업이 계속되었습니다.
음식에서 답을 찾다
그런데 어느 날 당뇨를 고치는 것이 과연 한약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옛 성현의 지혜를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부족함에 대한 변명이지만, 삼시 세끼 음식의 종류에 따라 크게 변하는 혈당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약이 아닌 음식에서 먼저 답을 찾아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제 몸에 맞는 음식을 구별하여 먹기 시작했고 그 결과 놀랍게도 혈당 수치가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혈당을 안정화 시키는 열쇠가 음식에 있었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당뇨 특효 한약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땐 보이지 않더니만, 지칠 때가 되니 이제야 답이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에 저의 썩은 동아줄 같은 끈기가 너무나 고마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체질에 맞는 음식들을 공부하고, 임상영양학 책을 뒤지고, 의학생리학 책을 뒤지고, 외국의 암치료 전문병원의 식단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 공부는 재미있었습니다. 임상영양사나 식이요법사들, 서양의사들이 보지 못한 부분들도 한의사이기에 보이는 부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제 몸을 이용하여 식이요법을 검증해보는 과정은 정말 소중하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날 큰 딸아이가 엉성하게 그린 그림 속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바라보며 껄껄껄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즐겁다 너무 즐겁다. 난 요리를 꼭 해야겠다. 식이요법 교실을 꼭 열어서 많은 사람들과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나누어야겠다. 그 날 저는 이런 다짐을 하였습니다.
한약과 체질의 중요성을 깨닫다
그렇게 당뇨는 해결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식이요법에 미쳐있는 시절, 갑자기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피곤함이 다시 시작되었고 혈당은 다시 불안정해졌으며 컨디션도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태양아래 모든 이로운 것이 그러하듯 평생 이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편식을 평생 권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한창 자랄 나이의 청소년에게 채식만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저는 이 때에 알게 되었습니다. 육식이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 채식이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법도 이 때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의사로서 완벽히 주종이 바뀌긴 했으나 식이요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한약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뇨약을 끊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출발선까지 인도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당뇨치료에 있어서 한약의 역할이었습니다. 또한 식이요법만으로 컨디션 조절이 안 될 때 간간이 써줘야만 하는 것도 한약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몇 년을 제 몸으로 실험을 하며 살았습니다. 체질을 나눌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찾기위해 한의원에 유전자 실험실도 마련했습니다. 꿈에 그리던 근사한 주방도 마련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제게 느닷없이 찾아온 당뇨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티벳에는 병을 달래며 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병을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제야 제 병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당뇨병이 너무 까다롭게 굴지 않고 저를 잘 따라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당뇨병을 앓고 계신 모든 분들이 저와 같이 당뇨와 친해지실 수 있길, 두 손을 맞잡게 해드리는 손이 부디 제 손이 되길 기원합니다. 모든 당뇨환자분들이 당뇨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